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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성  명 장   효   선 / 張 孝 善
생년월일
1957년 10월 16일
학  력
명지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박사
명지대학교 스포츠예술산업 석사
현 직위
(주)한빛예무단 대표
(사)한국검예도협회 회장 / 세계 검예도연맹 총재
세계 태극기공연맹 총재
명지대학교 자연 사회교육원 교수  
상  벌
1998. 12 “전통의상 한복발전” 문화관광부 장관상  
2008. 06 대한민국 국민건강문화대상 수상  
2010. 검예도 단체 종합우승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  
경  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예술지도자과정 수료  
전통무예 검예도 창시자  
용담검무 예능보유자 / 태극기공 창시자  
전) 대경대학교 연극영화 방송학부 겸임교수  
주요경력 
주  요  경  력
비  고
2014
10
2014’ 제60회 백제문화제 “계백장군 출정식” 총연출 및 진행 주최: 백제문화제 선양위원회
2014
10
2014’ 제1회 백제무사 “싸울아비” 선발대회 기획 연출 주최: 백제문화제 선양위원회
2014
8
2014’ 한국 스포츠 과학자 통합학술대회 “21세기 한국, 체육에서 길을 찾다” 주최: 한국체육학회
2013
8
미주 샌프란시스코 제21주년 한국의 날 문화축제 총감독 주최: 샌프란시코 한인회
2010~2012
04
경주동학문화축제 총연출 및 진행 주최: 천도교중앙총부/경주시
2006~2009
11
이충무공 노량해전 승첩제 총 예술감독 주최: 이충무공승첩제전회
2009
06
나라사랑 태극사랑 "대장군 온달장군 승전고" 퍼포먼스 총연출 주최: (사)만남 주관: 강남구, COEX
2007
02
신라밀레니엄 파크 “화랑의 도” 무예감독 및 연출 후원: 삼부토건/경주시
2003
MBC 드라마 “다모” 출연 및 무예고증 MBC문화방송
1996
07
아틀랜타 올림픽 개막기념공연 “MINING CAME" 무예감독 및 안무 주최: 문화 체육부 세계 올림픽 조직위원회
1993
08
MBC 드라마 “일지매” 무예감독 및 출연 외 다수 경력 MBC문화방송

검무가 장효선 
...
자기소개 

장효선은 무예와 예술 의 세계를 탐구하며 끊임없이 도전하여 한국의 전통무예 검예도를 창시 하였고, 검기무(기선무, 장검무, 쌍검무)와 150년의 역사를 가진 용담검무를 계승. 복원 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장르에서 사용 할 수 있도록 그 기법과 수련법, 기술체계를 정립 하였다. 검예도의 다양한 검 기술과 기법을 통하여 무예와 예술을 창조하고 그로 인하여 뿌리 깊은 전통은 보존하고 그 기반 위에 전통의 맥을 이어가며 새로운 전통문화예술을 만들어 무예와 예술의 문화적 가치를 새롭게 재창조 했다. 그 결과로 한국의 전통 무예와 예술 공연을 만들어 국내 및 국외에 보급 및 국위 선양을 하며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민족문화의 혼을 알리는데 일조 하였다.

꿈이 아주 많았던 어린 시절 장효선은 풍류가이자 마을 선소리 꾼이셨던 아버지로부터 칼춤과 풍류를 배우며 비교적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무예를 좋아해서 그랬는지 아버지께서 읍내 태권도 도장에 보내서 운동을 하게 했다. 태권도와 칼춤을 병행하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 도장에서 배우는 것도 했지만 가르치는 사범 역할도 할 정도로 무예 실력이 발전했다. 무예영화가 극장에 들어오면 어떻게든지 돈을 마련하여 무예영화를 꼭 관람했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낼 즈음 아버지께서 느닷없이 쓰러져 몸져 누우셨다. 광주에 있는 제중병원에 입원 하셨는데 간염이라는 병명이 나왔다. 그로 이해 5년 후에 별세 하셨다. 그때 서울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에서 의장대 행사 병으로 군복무 중이었는데 많은 슬픔과 아쉬움을 남긴 채 아버지는 곁을 떠나셨다.

제대 후 홀로 계신 어머니와 함께 집안일을 돌보며 무예 연마를 집중적으로 하기 시작 했다. 당시에 동네에 무예 실력이 아주 뛰어난 선배가 있었는데 매일 같이 무예를 연마하며 활 쏘기, 봉술, 창술, 칼춤, 권법을 연마하며 일상을 보냈다. 그 때 무예에 관하여 눈을 뜨게 되었고 자신감도 생겼다. 아버지께 배웠던 칼춤이 몸에 무르익어 검만 들어도 즐거웠고 눈만 뜨면 권법과 검무를 추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 선배 한 분이 서울 보문동 에서 태권도 체육관을 운영 하고 있는데 도와 달라는 예기를 듣고 서울로 상경 했다. 무작정 상경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희망도 없는 그런 힘든 서울 생활의 출발이었다.

고향 선배 체육관에서 생활을 하면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그야말로 밑바닥 삶을 시작했다. 힘든 체육관 생활을 하면서도 검무와 무예 권법을 열심히 연마했다. 틈만 나면 주변 야산이나 능에 가서 더 깊은 무예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많은 무예와 연관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영화에 관련된 배우들을 만나게 되면서 무예영화에 무술배우로도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두용 김독님과 무예를 잘 한다는 이유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무예는 뛰어났지만 연기가 잘 되지 않아 배우로 성공하기에는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무예를 예술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연극과 공연무대를 알아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대 앞에 작은 하숙방을 구하고 본격적으로 무예의 표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정한 수입이 없고 해서 하숙비 내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늘 불안한 상태로 하고자 했던 검무와 무예를 연마하며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무예를 연마하며 같이 무예를 연마 하게 되는 동료 2명을 만나게 되었다. 영화 무예부터 시범, 공연 까지 한마디로 무예의 천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의 무예 실력은 뛰어났고 우리는 눈만 뜨면 체육관에 모여 피와 땀과 눈물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 무예의 역사를 새로 쓰자며 서로를 위로 했고 모두가 무예의 귀재들이 되어갔다. 무예를 총 정리하여 1984년 남산 드라마쎈타에서 무예극 [배꼽.무.무.무(武.舞.無)]를 무대 공연으로 올렸다. 검극의 형태로 검무와 검무로부터 탄생되는 검예도의 첫 공식 출연이었다. 이 무예 공연을 준비 하기 위해 8개월이나 무예 배우들과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오직 무예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는 기쁨 하나로 어떤 힘든 상황도 무조건 이겨 내야만 했고 젖먹던 힘까지도 모두 쏟아내어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우리가 만든 무예극은 연극인들에게 만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 무예극은 한국 무술 공연의 표본이 되었으며 무예 퍼포먼스의 효시가 되었다.

그 후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검무의 기본적인 동작과 그 동안 연마하여 얻은 검의 예술적 기능을 완성하여 검무 공연에 치중 하게 되면서 수 차례 검무 발표회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로 장검무와 쌍검무를 원론적으로 복원 하고 재연 하여 자료정리와 무대 발표회를 가졌다. 그리고 한국적인 검 수련법의 체계를 갖춘 검예도를 창시하게 되었다. 검예도는 검무의 원리와 기법에서 그 실기의 틀이 나왔고 우리민족의 사상과 철학에서 그 이론을 찾았다. 끊임없이 검무와 검예도를 체계화 하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보급하기 위해서 장소를 찾다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마당에서 보급하기로 결정하고 붓으로 검무와 검예도 수련생 모집이라고 써서 방을 붙이듯이 붙이고 수련생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수련 시간은 새벽 6시부터 7시까지 였다. 처음에는 제자와 둘이서 시작했다. 전화번호도 없고 연락처도 없기 때문에 검예도를 배우려면 마로니에 공원으로 나와야만 배울 수 있었다. 처음 시작이 겨울이었기 때문에 새벽 6시면 어두웠고 제법 추웠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는데도 한 명의 수련생도 오지 않았다. 좀 무모한 것 같고 무리인 것 같아서 그만 접으려고 생각 했지만, 이왕 시작 했으니 일주일 만 더 해보자 하고 좀더 기다리며 계속 새벽에 나가서 홀로 수련을 계속하며 수련생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젊은 남자 3명이 불청객처럼 나타나서 수련 하고 있는 검예도를 지켜보더니 “여기가 수련장이에요?” 하면서 배우러 왔다고 언덕에서 공원 아래로 내려왔다. 신이 내려준 선물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수련생이 늘어갔다. 수련생 중에는 일반인 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연극과 영화를 하는 배우들 이었으며 모두 25명이나 되었다. 더 이상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고 수련생들 대부분 검예도 실력도 늘어서 공연이나 예술 활동에 사용 한다는 등 효과가 좋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보람도 있었지만 검무와 검예도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설레기까지 하여 잠을 설치는 날도 많았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검예도는 수련생들이 계속 늘어 나는 바람에 대학로 주변 건물을 임대 하여 간판을 달고 본격적인 보급에 들어갔다. 검예도 교본도 책으로 출판했고 지도자 교육도 시작하고 본격적인 검예도 보급을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검무를 정리 하면서 용담검무의 계승과 복원에도 치중하였다. 용담검무는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글과 검으로 창도 하여 널리 폈는데 그 검이 바로 용담검무이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검무가 용담검무 라는 것을 연구 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포기 하고 싶을 정도로 금전적으로 어렵고 가슴 아팠지만 우리 5대조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거쳐 이어져 내려와 계승 되었다는 것을 알고 용담검무 무보, 의상, 음악, 동영상을 만들어 15년에 걸쳐 어렵게 완성 하였다. 더불어 못다 한 학업을 계속 하기 위해 대학의 문을 두드려 연극영화를 공부하고 스포츠예술과 예체능의 체육학을 공부하면서 용담검무와 검기무 그리고 검예도의 이론과 학문적 영역을 명료하게 정리 하게 되었다.

현재의 장효선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우리무예 [검예도]를 창시하고 한국의 전통 칼춤. 용담검무를 계승, 복원, 재현하여 정립 하였으며, 장효선 검기무(기선무, 장검무, 쌍검무, 쌍검대무)를 복원, 재현하여 한국의 전통문화예술 보급, 발전과 우리무예 검예도 보급에 힘쓰고 있다.

국왕호위군 재현 행사와 뮤지컬 명성황후를 비롯하여 이순신장군 일대기 재현. 백제군사와 계백장군출정식, 노량해전승첩제, 온달장군 승전행렬, 김유신장군 승전행렬, 동학문화축제, 뮤지컬 장보고, 창무극 광개토대왕. TV드라마 일지매,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국의 날 퍼레이드, 한국의 왕 재현과 장수단 행렬 등 30여년에 걸쳐 무예와 예술의 예능으로 국위 선양을 하며 전통문화 예술의 금자탑을 쌓았다.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검무를 배워 검과 더불어 유년기를 보내면서 검무의 형식과 기능에서 예술과 무예를 체득 하였으며 각고의 노력의 결과로 검예도 라는 전통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한국적 검기술을 담은 우리무예를 27세 때에 창안 하여 국내와 국외에 널리 보급 하고 있으며 수련법을 통하여 건강, 호신, 무예, 사회체육, 예술의 전반적인 사회활동 분야에 많은 에너지를 제공 하고 있다.

더불어 검무의 형식을 다양한 각도에서 재정립하여 장검무(전장 검 길이 105센티미터 1자루로 추는 칼춤), 쌍검무(검 길이 105센티미터 2자루로 추는 칼춤), 쌍검대무(검 길이 105센티미터 2자루를 들고 2명이 마주 하며 추는 칼춤)를 복원, 재현 하여 연극, 영화, 드라마, 오페라, 뮤지컬, 축제 등 예술문화가 펼쳐지는 다양한 장르에서 지대한 영향을 제공하며 활약 하였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또한 우리의 민족적 자주정신이 깃든 수운 최제우선생이 추었던 용담검무(검결)를 부친으로부터 계승하여 20여년에 걸쳐 용담검무의 춤사위와 검결의 검무 동작, 무보, 음악, 의복, 무구를 정리하여 한국의 검무 연구와 공연예술, 전통무용, 노인건강 생활체육 분야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현재 한국검예도협회와 세계검예도연맹 총재. 한빛예무단 대표와 체육학 박사를 수료하고 명지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는 자전적 소설 무심(武心)MooSim 달품은 용천검, "용담검무"yong dam kummoo 가 있으며, 박사학위 논문으로는 "용담검무(龍潭劍舞)의 춤사위와 검결(劍訣)의문화적 가치에 관한 연구" A Study for the Cultural Value of YongDamgummoo Shown by Movement Ritual and GumGyeol. 이 있다.